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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은 초보 활동가의 반빈곤 운동과 진보적 장애운동 활동을 담은 꼭지

 

 

장마가 가고 무지개가 뜨는 대신

장마와 퇴거 이후, 사람은 떠나도 감정은 떠나지 못한 자리에서  

 

<민푸름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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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쪽방촌의 화목한 사랑방 <사진=필자>

 

장대비가 휘몰아치던 8월, 장마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 변하거나, 멈추거나, 송두리째 쓸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누군가의 일상은 예외적인 사건 없이 그렇게 또 흘러갔다. 퇴거명령을 받은 창신동 주민 분들의 일상이 그랬다. 장마에도 퇴거명령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지 않았고, 주민 분들은 예외 없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사를 하시기도, 마을을 떠나시기도, 홀로 빈 건물에 남겨지기도 했다. 

장마가 끝난 뒤 다시 찾아간 창신동은 조용해 보였다. 창신동에서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아랫마을 큰 쪽방건물이 통째로 팔려 주민 분들이 모두 짐을 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난 주민 분들도, 떠나보낸 주민 분들도 할 말이 없어서, 느끼는 바가 없어서 조용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을에는 시끄러운 침묵이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시끄러운 침묵은 여러 상반되는 감정들 사이를 진동하며 마을과 주민 분들을 관통하고 있었다.

예컨대, 저이는 그나마 이사 갈 방을 구했지만 나는 방을 구하지 못해 퇴거명령이 떨어진 건물에 혼자 남겨졌다는 고립감. 그럼에도 20일에 단전이 되고 30일에 건물이 문을 닫아 정말 혼자 남겨져도 버틸 수 있을 만큼은 이 방에서 버티며 이곳이 ‘나의 집’, ‘나의 방’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은 뱃심. 방을 옮기기 위해 짐을 싸며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간 꾸려온 보금자리를, 한 평 방을 보금자리로 만들기 위해 애써왔던 시간들을 내 손으로 허무는 것 같았다는 헛헛함. 그렇게 간신히 싼 짐을 재개발로 인해 곧 다시 싸게 될 것 같아 방을 옮겼음에도 짐을 풀기 어려운 위화감. 그럼에도 짐을 풀지 않으면 방을 방 같지 않게, 오랜 간 살았던 마을을 처음 이사 왔던 날처럼 낯설게 만드는 외로움.

 

쪽방이 아닌 하꼬방이라 부르던 시절 방을 사서 수십 년을 그 방에 살아 얼굴도 모르는 건물주로부터 급작스레 쫓겨날 걱정은 없다는 안도감. 그러나 방 한 칸 내 것이라고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 받지 못할 것이 예상되는 두려움. 운 좋게도 임대주택이 당첨돼 이제는 정말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해방감, 그러나 정든 동네와 이웃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포. 그렇다고 쪽방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는 않은 배척감. 내가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는 허탈함.

 

사방팔방으로 흩어질 때가 되어서야 식권이라도 준다는 괘씸함. 그러나 그 식권이 의외로 끼니 걱정을 없애줘 일상의 걱정 하나를 덜었다는 평온함. 그러다가도 글을 쓸 수 없는 나에게 인적사항을 적어야만 밥을 주겠다는, 내 무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시장이 에어컨을 달아줘 방 밖에 나가지 않아도 그나마 시원하니 문득 드는 감사함. 그러나 ‘에어컨이라도 달아줬으니 감사하지 않냐’는 말에는 불끈 화를 내게 되는 울컥함. 그 울컥함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을 쐬기 위해서는 방문을 상시 열어 두어야 해서 내 방이 오롯이 내 방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이질감.

올 8월의 장마는, 창신동 주민 분들 마음 한편에 쳐져 있던 복잡다단한 감정의 거미줄에 빗방울을 남겼고, 장마가 끝난 지금 그 빗방울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그 누구도 그 거미줄을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덕택에 주민 분들과 다른 관계 맺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인사라도 받아주셨는데 이제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등을 돌리시는 주민 분들이 생겼다. 그 전에는 이것저것 도우려온 착한 자원봉사자들이라고 우리를 반겨주셨는데, 가뜩이나 정신없는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물을 흐린다고, 내쫓아야 한다며 흘겨보시기도 한다. 그러시다가도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쭤보면 그저 잘 지낸다고 신경 쓸 것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내쫓으시다가도, 이내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시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운을 떼시고는 잘 못 지내시고 계신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꺼내신다.

 

어제와 오늘, 아까와 지금 다른 얼굴과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 분들을 뵈며 주민 분들이 말씀하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을 새롭게 되새긴다. 마냥 좋지만도, 마냥 싫지만도 않은, 평생을 머물고 싶다가도, 평생을 머문다는 생각에 지긋지긋하기도 한 창신동에 대한 마음들을 나는 지금부터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마음들을 다시 묻어두지 않고 함께 잘 오랫동안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서를 맞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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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화목한 사랑방에 걸린 무지개 커튼 <사진=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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