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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less NEWS

홈리스뉴스 소식지 입니다.
조회 수 : 95
2023.05.20 (11:51:10)

[똑똑똑]은 초보 활동가의 반빈곤 운동과 진보적 장애운동 활동을 담은 꼭지

 

 

인생은 시트콤

웃어넘기기 어려운 일을 웃어넘기는 우리의 힘에 대하여

 

<민푸름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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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를 딸이라고 소개한 주민과 방에서 부탄가스를 난방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필자 제공>

 

근래 일상의 장르가 신파였다. 가까웠던 상대에게 내팽개쳐지고, 사무실에선 고비를 넘긴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첩첩산중이었다. 굶고 다니다가 위가 아프면 간신히 담배를 물었다. 지하철 차벽에 기대 있다가 쿨토시를 파는 행상인을 보며 뜬금없이 훌쩍이고, 책상 앞에 큰 맘 먹고 앉았는데도 문장이 써지지도, 읽히지도 않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겨우 집 앞까지 신파에 절은 몸을 질질 끌고 와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어대기도 했다. 아침드라마에서도 써먹기 민망할 장면들이 내 일상을 지배했다. 지긋지긋했다.

 

웃어넘길 만한 일로 바꾸는 힘

원래 내 일상은 주로 시트콤이었다. 웃어넘기기 어려운 일을 웃어넘길만한 일로 만들어서 신파를 시트콤으로 바꿔내는 힘. 그게 내가 이 거친 세상을 살며 갈고닦은 무기였다. 그 무기가 박살났으니 나는 날 것의 신파에 휩쓸렸던 거다. 이 힘은 꽤 쓸모 있다. 특히 나처럼 당사자를 직접 조력하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맞서 투쟁해야 할 때와 (비)웃고 넘겨야 할 때를 구분해 내야 한다. 그래야 투쟁을, 나와 당신과 우리와 세상의 관계를 재조립하는 일을 서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지치고, 회복하며 계속 할 수 있다.

창신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은 건물주와 구청과 서울시청을 쫓아가야 하지만, 어떤 일은 방안에서 함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전쟁’을 배경음으로 호박씨를 까다 ‘그렇지? 역시 내가 맞지?’ 하고 깔깔 웃고 넘길 일이다. 나는 이 둘을 구별하는 데는 약하지만, 웃어넘길 일로 만드는 건 잘하기 때문에 주민 분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쪽방에 나란히 수십 분씩 앉아서 추임새를 넣고, 이야기의 끝에서 같이 깔깔 웃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 

 

시트콤을 만들지 못하는 나날에

이 일은 특히 창신동이라 중요했다. 재개발사업 공고가 나고 단번에 주민들의 절반이 사전퇴거를 당했는데, 삽을 떴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작 진짜 재개발은 몇 년은 지나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주민들은 그만큼의 시간 동안 방치된 이 창신동 쪽방촌에서 불안, 공허, 절망이 한데 뭉쳐진 감정의 응어리들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 조금 더 많은 시트콤의 장면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내 추임새도, 웃음소리도 시원찮아지니 주민 분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내 안색을 살폈다. ‘눈 좀 붙이고 가’, ‘몸 좀 지지고 가’, ‘뭐 좀 입에 밀어 넣고 가’, 나는 무심하게 ‘다음에요’라고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신동을 돌며 주민 분들을 만나 뵈었다. 으레 마지막 차례였던 주민 분을 만나 뵈러 갔다. 나란히 앉아 별 뜻 없는 얘기를 나누며 담배를 태우는데, 웬 손님이 찾아오셨다. 눈치 상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손님이 주민 분께 나를 가리키며 ‘쟈는 누구고’ 하고 물으셨다. 주민 분은 무심하게 문을 닫으시며 ‘어, 딸’하고 답하셨다.

 

들었던 얘기든, 처음 듣는 얘기든

대항로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을 쿵쿵 치며 엉엉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진이 빠졌다. 사무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부은 눈을 본 활동가들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창신동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활동가들은 깔깔 웃었다. ‘자기 요즘 작은 것에도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구나’, ‘자기는 한 시간이면 붓기 빠지나? 그럼 더 울어, 붓기 잘 빠질 때 많이 울어 둬야 돼.’

 

나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순식간에 터져버린 웃음에 담배연기를 잘못 들이마셔 콜록거리면서도 농담을 하며 같이 웃어버렸다. 한바탕 웃고 나니 조금씩 실감이 났다. 일상의 장르가 시트콤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완전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힘을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회복의 과정에 창신동과 대항로가 있다는 사실이. ‘다사다난하니 시트콤 같고 좋네’ 하는 활동가 동료의 말에 나는 확신이 섰다.

 

왜 나를 딸로 소개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의 집 앞 골목에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고, 근처 노점에서 이천 원짜리 배추전을 나눠 먹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나는 그에게 병원에 가라고, 그는 내게 밥을 챙겨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중년 남성들이 우리를 흘겨보면 우리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주저앉아 담배 피우는 여자 처음 본다니?’ 그는 신나게 말을 이어나간다. 들었던 얘기든, 처음 듣는 얘기든 뭐든 좋다. 역시 인생은 시트콤일 때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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