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뉴스

Homeless NEWS

홈리스뉴스 소식지 입니다.
조회 수 : 43
2024.02.06 (01:50:42)

[특집]

 

세상을 떠난 동료를 추모하며

홈리스 당사자 4인의 동료를 위한 추모사

 

홍렬이형을 기리며

 

<박종만 / 양동쪽방주민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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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수년 동안 양동쪽방주민회의 조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진=홈리스행동>

 

고인은 1957년 부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5남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 속에서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진학할 즈음 가세가 기울어져 상고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상업은행에 입행하였습니다. 

 

상업은행 근무 중에는 좀 더 큰 꿈을 위하여 퇴근 후에 기관사 시험공부를 준비하여 기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상업은행을 퇴직하게 됩니다. 꿈을 위하여, 오대양 육대륙을 누비기 위하여 대형 상선에 취직하여 외국으로 파견 나가면서 젊은 날의 이상을 펼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강요로 인하여 원치 않는 결혼을 , 부인이 지병을 숨기고 결혼을 하여 3개월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파탄을 맞게 됩니다. 이때의 충격으로 인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은 고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과 마음이 서서히 절망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고인은 이때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경상도 지방의 돼지 농장과 경기도, 충청도 지방의 닭 농장 등으로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평소 친구와 술을 즐겨하던 고인은 서울역에 와서 그동안 힘겹게 번 돈으로 친구와 이웃들에게 술과 밥을 사면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셨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하면서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고 농장 생활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면서 서울역 건너편 양동 쪽방촌으로 거주하게 됩니다. 양동쪽방주민회의 초창기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방송국 인터뷰나 시청 앞 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던 중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본인에게는 외로움으로 남겨져 술과 번뇌로 그리워하던 중 8월 12일 오전 7시경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은 양동쪽방주민회 1호 장으로 9월 24일 경기도 파주 용미리에 모셨습니다.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시고 본인보다 어려운 이웃을 보시면 측은지심이 생각나시어 항상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홍렬이 형.

 

분명 좋은 곳에 가시어 평소 몸 때문에 꺼렸던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고인께서 이승에서 못 이루신 꿈 마음껏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홍렬이형.

 


 

 

거리에서 생을 마친 계훈, 바람이에게

 

<이OO / 서울역 홈리스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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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역 인근에 차려진 고인의 제사상 <사진=홈리스행동>

 

전 서울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올해까지 22년 거리 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청량리역, 용산역, 종각역, 중구 순화공원, 서울역 서부에서 주로 생활을 해왔습니다. 22년 거리 생활 동안 떠나간 주변의 노숙 동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서울역 서부 텐트촌에 살 때 만난 계훈이와 바람이 생각납니다. 거리에서 생활해서 장례에는 두 사람 장례에는 참여 못 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두 사람을 위해 거리에서 추모식이라도 열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모를 짧게 하겠습니다.

 

계훈 동생은 서부역에 제일 먼저 텐트를 치고 살았지. 내가 서부역에 2년 전에 텐트를 칠 때는 벌써 대여섯 개 텐트들이 계훈 동생 텐트 주변을 감싸고 있을 때였지. 계훈 동생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 그래서 그런지 매일 매일이 술이였어. 매일 매일이 술이라 당연히 건강은 안 좋아졌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때가 많았지. 그럴때 담배도 사주고, 술도 사준 기억이 나는군. 계훈 동생이 왜 주거지원 안 받았는지 나는 알고 있지. 텐트에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술 먹을 사람들도 있는데 그 조그만 방에 들어가면 외로우니까 그래서 안 들어갔잖아. 그렇게 사람 좋아하던 계훈 동생이 1월에 텐트 밖에 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이나 놀랐어. 거기는 여기보다 따뜻한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나의 이웃 바람씨. 바로 옆 텐트에서 살았는데 나를 아저씨로 불렀지. 바람이 텐트촌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했을 때, 다른 이한테 맡긴 텐트를 받아서 텐트를 쳐 준 기억이 나네. 그때부터 나의 이웃이 되었지. 제 기억에 바람은 첫날에 하루종일 잠만 자더니 잠에서 깬 뒤로 밥도 안 먹고 막걸리, 소주를 마셔서 “그러다가 속 버린다. 채움터라도 가자.”하니까 거기는 식당이 아니라서 싫다고 거절했지. 그러면 양평해장국에서 국밥이라도 사먹으라고 돈을 줬는데 막걸리를 사와서 좀 서운했지. 그 뒤로 간섭을 안 하고,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던 것 같네. 다 큰 어른한테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면 안 되니까요. 바람의 살아온 이야기는 알지 못하지만, 술로 힘듦을 견뎌내야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 올해 4월쯤 바람이 맞아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 거기는 여기보다 안전한지 궁금하구나.

 

앞으로 희망이 있다면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족과는 떨어져 살지만, 그래도 주변에 친구, 형, 동생들이 있으니 노숙인이 죽으면 거리에서 추모식이라도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계훈이와 바람이가 거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별이된 거리의 여성들을 추모하며

 

<서가숙 / 홈리스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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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임OO 씨의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서가숙의 모습 <사진=홈리스행동>

 

활동하며 여성홈리스들을 자주 만난다. 작년에 만난 안OO, 얼굴은 시커멓고 말랐다. 나와 분도이웃집 수녀님과도 대화를 많이 했다. 추석에 가보니 항상 있던 자리에 없어 대구 언니에게 물으니 병원에 갔고, 별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식을 수녀님께 알리고 난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그녀가 간암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이는 우리한테 많은 말을 했었다. 건강해지면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주소지가 등록된 곳이 서울이 아니라서 우리가 장례를 치루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병들어서 거리에서 지내다 죽을 때가 되어 병원에 가 얼마 안 있어 멀리 가버렸다. 모든 짐도 주인을 잃었다. 활동하며 많은 분들의 별이 된 소식을 접하니 맥이 다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만난 다른 여성홈리스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다. 한참 전에 분홍 옷에, 분홍 나일론 보자기에 개나리봇짐 마냥 싸서 다니는 언니와 다시서기에서 자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통 안 보였다. 언니가 아프다고, 사람들한테 119를 불러 달라고 해서 실려 갔다고 한다. 나중에 경찰로부터 별이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경찰은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 같다. 언니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누구와 말을 하는 것을 못 봤다. 지금도 그 언니가 스타벅스 자리에서 늘 담배피던 게 기억난다. 서울역 2층 유실물 쪽 화장실 창문 여는 턱에 누워있기도 했었다. 

 

임OO. 거리에 살았기에 오가며 보았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올해 골목에서 3시간 넘는 폭행으로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졌고 열흘 후에 떠났다. 연락 없이 지냈지만 가족이 있었는데 행려인이라고 막 다뤄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병원에서도 별 조치를 안 한 것 같다.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인데 그녀는 그걸 다 겪고 홀로 떠났다.  

 

지금 영하 14도 되는 이 마당에도 여성홈리스들은 거리에서 꼼짝 않고 비닐이나 파라솔, 우산으로 가리고 한뎃잠을 자기 위해 저녁 11시면 잠자리 준비를 서두른다. 70대, 80대인 나이 많은 여성홈리스라도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막 대한다. 잘 때 모습을 가리고 자니까 사람들은 여성인 줄 모르지만 여성홈리스는 어디에나 있다. 충정로역 김OO. 박스를 챙겨 옆구리 끼고 다니며 살았는데 요즘 안 보인다. 추운데 따뜻한 방에 살고 있으면 좋겠다. 홈리스는 일정한 장소서 지내고 옮겨봤자 영등포, 용산, 종각, 수원, 평택, 대전, 그리고 또다시 서울역에 돌아오곤 한다. 역 근처에 머문다. 정부에서 우리 존재를 파악해 주거를 제공하고 무슨 사정 때문에 주소지등록이 안 되는 곳에서 살더라도 생계비, 주거비, 의료비를 지급하면 좋겠다. 거리홈리스가 365일을 모두 거리에서 지내는 게 아니다. 끝으로 추모시 낭독으로 추모사를 마친다.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보따리도 챙기지 못하고 

여행을 떠난 많은 님들을 떠나보내며,

채 식지도 않은 뜨거운 재를 뿌리며,

허망하기도 안타깝기도 했지만,

부디 그곳에선 행복하소서.

편히 쉬소서.

못다 이룬 것,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고이 잠드소서.

 

[추신]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이름 없는 꽃이지만 향기가 있던 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리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에게

 

<김OO / 홈리스 당사자>

 

저는 중앙지하도와 서울역에 머문 지 5~6년 되어가는 김OO입니다. 이 생활을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 많이 봤는데 기억에 남는 여자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이유는 참 사람이 얌전했어요. 얌전하고, 술을 먹어도 얌전했어요. 술 먹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술을 먹더라도 항상 얌전했어요. 술 자주 먹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성격이 드러나거든요. 그러는데 이분은 아주 얌전하고, 말도 없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작고했다는 말을 듣고 참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그 죽게 만든 사람이 그 여자 분을 따라다니는 사람이었거든요.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자기가 뭐 오라버니라고 그렇게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나중에는 말을 안 듣는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했는데 이건 사람으로 할 짓이 못됩니다. 

 

그리고 거리홈리스들은 이승에 왔다가 죽을 때, 그래도 자기 수명을 다하고 죽으면 그게 뭐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어렵게 살다가 힘들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니까 모든 게 다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거리에서 산다는 건 결국에는 자기의 수명대로 다 사는 삶이 아니거든요. 거리에서 산다는 게 굉장히 어렵고 모든 것이 다 어렵습니다. 주위 환경이나 여러 가지 여건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에서부터 원하는 시간대에 눈을 감는 것조차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처럼 지하도에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녁 7시에 지하도에 자리를 깔면 새벽 4시면 일어나야 됩니다. 7시부터 4시까지는 잠자는 자리였는데 4시가 되면 통로가 되어버려요. 통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되니까. 이 모든 게 모든 여건이 다 힘든 상태예요. 그리고 이런 힘든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기서 쫓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한테 그리고 또 그런 위험이 있는 분들한테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편안하게 살지도 못하고 어렵게 살다가 작고하셨는데 하루만이라도 천국에 가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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