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철|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지난 겨울 동안 노숙인 문제에 관한 언론보도가 많았다. 원래 겨울철에 노숙인에 대한 언론 보도가 많아지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다. 이번 겨울이 유독(?) 춥기도 했지만 ‘노숙의 메카인 서울역 주변지역’이 예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그 이전과는 달리 서울역사 내에서 노숙인을 밀어내는 강도가 매우 높아져 노숙인 수가 줄었다는 것, 대신 서울역 주변의 지하도나 가건물에 노숙인 응급대피소가 생겼다는 것, 서울역에 있던 노숙인들 중 일부가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는 것 등의 차이점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된 내용들은 파편적이나마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보도된 바 있다.

 

노숙인은 왜 서울역에 갈까?
도대체 왜 노숙인들은 서울역에 모이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노숙인에게 주어지는 서비스들이 서울역에 많다보니 노숙인이 모여든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소위 ‘약속의 땅(mecca)’ 이론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반대로 노숙인에게 주는 서비스를 줄여야 노숙인이 모이지 않는다는 정책방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노숙인이 ‘노숙인에게 주어지는 온정적 서비스’ 때문에 이동하고 모여든다는 이 가설에 대해 외국에서는 실증적인 검증작업이 시도되었던 적이 있다. 분석 결과는 가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노숙인은 안전과 기회(일자리)를 찾아서 이동하지 ‘노숙인 서비스’를 위해서 이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밀한 실증분석결과가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노숙인은 집이 없다. 자신이 사생활을 안전하게 지키고 노동력을 재생산할 공간이 없다. 따라서 집을 대신할 장소를 물색한다. 그나마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곳은 공공장소이다. 다른 사유화된 공간은 사용할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는 폭력이나 범죄로부터 그나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인력시장과 같이 일자리에 대한 정보도 보통 공공장소 주변에서 유통된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역이다. 서울역에 오는 노숙인은 생존장소의 대안이 없어 서울역에 오는 것이다. 특별한 혜택을 찾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의 학대와 매질에 못이겨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면서 역사 바깥으로는 한 발도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욕설을 듣거나 매를 맞을 것이 두렵고, 그럴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할머니는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쫓아낼 때에 이리저리 피해다니면서도 서울역 안에 앉아 있고 싶어했다. 이 할머니가 철도이용고객들의 불쾌감, 불안, 테러위험을 야기하는 노숙인이라며 내쫓고 있다는 것은 가혹한 처사로 보인다.

 

주거가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노숙인이란 술에 취해있거나 제 정신이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자활하려는 의욕도 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집이 없는 사람이 노숙인이지만, 주거취약계층으로 여기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곤 한다.

 

지난 해 한국도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정상적인 집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20만명에는 만화방이나 PC방, 찜질방같은 다중 이용시설을 숙소로 이용하는 사람들과 여인숙, 쪽방 등 비주택 거주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거리에서 자고 있는 노숙인 약 2,700명도 포함되어 있다. 그나마 거리에서 자는 노숙인 2,700명은 매일 밤마다의 수치이기 때문에 연간으로 거리에서 노숙을 경험하는 사람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저렴주거’가 모자라는 주택문제에 기인한다. 마치 노래를 부르다가 신호에 맞추어 의자에 앉는 게임처럼 탈락해 나오는 사람이 부족한 의자 수만큼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탈락하는 사람들은 경쟁력이 취약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 중에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나 알코올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도 높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다. 저렴주택의 부족이다. 기본원인을 사람의 문제인 것으로 보아서는 온당치 않다. 수천명의 거리노숙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임의 규칙이 우리나라 주거빈곤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태하거나 음주의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노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숙생활을 오래 하면서 알코올이나 기행(奇行)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알코올중독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노숙인에게 알코올중독 치료를 행한다고 해서 노숙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상담이나 치료서비스를 잘 연결하는 것은 중요하고 노숙인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노숙문제에 대한 결정적 대응이 될 수는 없다. 주거취약성이 핵심인 노숙의 문제를 사람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특히 이는 일부 취약계층에 대해 지나친 배제로 귀결될 수 있다. 지금 공공장소에서 노숙인을 몰아내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난장’을 피우는 노숙인보다 그렇지 않은 노숙인이 더 많다. 계속 일자리를 찾고, 자활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노숙인이 더 많다. 단지 일반인의 눈에 ‘기이한 행동을 하는’ 노숙인이 더 잘 뜨일 뿐이다. 노숙인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노숙의 문제를 사람의 문제로 여기는 동안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정상적인’ 노숙인을 두려움과 배제에 빠뜨리게 된다. 서울역처럼 ‘노숙인이 갈 수 없는 공공장소’가 있다는 것은, 집이 없는 가난한 계층은 주요장소에 출입하지 말라는 계급사회의 공언이나 마찬가지이다.

 

코레일의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조치
지난 7월 코레일은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퇴거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노숙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지목하여 몰아낸다는 조치에 대해 인권단체나 시민단체들로부터 반인권적 차별적 성격이 지적되고 논란이 시작되었다. 노숙인을 어떻게 구별하느냐에 대해 서울역 관계자는 ‘지나치게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라는 노숙인 구별기준을 밝혀 공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일등 역사에는 그에 맞는 소비능력을 가진 시민이 아니면 아예 출입하지 말라는 식의 차별이었다. 이같은 차별적 정책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비판을 내어놓았고, 시민사회의 많은 반발이 나타났다.

 

그러자 코레일측은 ‘노숙자 퇴거’가 아니라 ‘서울역사 내에서 노숙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누가 되었건 서울역사 내에서는 임의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숙인’이라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노숙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라고 명분을 조금 더 보강한 것이다. 그리고 8월 22일부터 물리력을 동원하겠다고 공언한 뒤, 물리적으로 노숙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는 서울역사에서 노숙인과 이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려는 코레일 측의 충돌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져 주요 언론사의 취재진들과 인권단체,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간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서울역에서는 노숙인을 몰아내는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야간의 일부 시간대에 노숙을 규제하는 것이었다가 점차 그 작업은 강도가 더해져서 이제는 ‘노숙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서울역에서 쫓아내고 있다.

 

서울역 주변에 지하도나 가건물을 이용한 응급대피소가 새로 만들어져서 노숙인을 수용하는 대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적정 수의 인원을 초과하여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했다. 얼마전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과장하고, 이곳을 이용하는 노숙인의 범죄성향 탓이라고 왜곡하여 범죄와 폭력의 온상이라는 식의 보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서울역에서 쫓겨난 노숙인들은 응급대피소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이동하기도 하였다. 사실 적절한 주거를 확보하는 것에 대한 대책과 지원은 나중이고, 일단 쫓아내는 것이 우선이니 근처나 다른 지역으로 노숙인의 이동을 부추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반 인권적인 노숙인 몰아내기에 함께 저항하기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 올 6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은 지난 2011년 제정되었고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준비되어 올해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여기에서는 노숙인 등 주거취약계층의 권익을 보호하고 주거가 없는 위기상황에서 응급조치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의 노숙인 복지가 한 단계 더 진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서울역 노숙인 문제의 속내를 살펴보면 걱정되는 바가 크다.

 

노숙인이 서울역으로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지금 서울역은 몰아내기가 우선이다. 역사(驛舍)는 일반 시민의 집이나 영세 영업장같은 순수 사유공간과는 다르다. 공공성을 띠고 있는 장소다. 집이 없는 사람이 공공장소에 가 있는데 여기서 쫓아낸다면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범죄가 우려된다면 방법활동을 강화할 일이지 ‘노숙인을 쫓아내는 것’으로 대처할 일은 아니다.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새 시장이 ‘시민 아무도 배고프고 춥게 지내지 않게 하겠다’는 소위 희망온돌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배고프고 추운 전형적 대상인 노숙인에 대해 관심과 민간 자원을 활용한 지원방법 모색도 지난 겨울 언론에 자주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편에서 대거 노숙인을 쫓아내고 있는데 민간의 구제노력으로 노숙인의 고통이 줄어들리 만무하다. 시행될 법에 주거위기시 응급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면, 일단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서울역의 노숙인 축출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서울역에 노숙인이 모일 이유가 없도록 공공이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있지도 않은 ‘노숙인을 위한 다른 장소’로 가라며 내쫓는 것은 곤란하다. 지금 서울역 주변 행태는 거리노숙인을 위한 대안적 정책마련에 초점이 있지 않다. 분명 역사에서 노숙인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반인권적 배제에 목적이 두어진 활동이 자행되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노숙인이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노숙인 복지가 증진된 지표라 할 수는 없다. 이들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지내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일등 역사(驛舍)는 가난하고 남루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화려한 역사가 아니라 공공의 책임을 다하는 곳이다. 추운 겨울 내내 가난한 사람을 쫓아내는 공공역사는 삼류다. 저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