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전, 한 노숙인이 숨을 거뒀다. 그날 새벽 서울역 직원들은 술에 취해 있는 노숙인을 역사 밖으로 끌어냈다. 노숙인은 만취한데다 어디에선가 이미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라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영하 6도의 강추위에 그대로 방치됐다. 노숙인을 발견한 것은 제설작업을 하러 나온 공익요원이었다. 공익요원은 노숙인을 휠체어에 태웠지만, 노숙인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다 내려놓고는 가버리고 말았다. 노숙인은 그렇게 죽고 말았다.
사인은 골절과 과다출혈이었지만, 노숙인을 혹한에 장시간 방치했을 때, 이미 그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은 되풀이된다. 최근에도 며칠 간격을 두고 맹추위 속에서 노숙인이 동사했다. 그들이 차가운 거리로 추방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을 법과 질서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관리에 실패하여 타락한 자들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숙인의 증가는, 사회가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떠밀려나간 사람들을 돌보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다. 본질은 빈곤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기에 슬쩍 범법의 문제를 끼워 넣는다. 그들을 ‘돌봐야 하는 자’에서 ‘추방해야 마땅한 자’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범죄의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노숙인 생활을 더 할 이유 없이 이미 범죄를 저질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노숙인은 그곳에서 추방당할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제거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소동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추방을 당한다.
사람들이 노숙인에게 느끼는 것은 불안감이다.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 사회, 강준만 교수의 표현처럼 ‘각개전투’를 해야만 하는 이 냉정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다. 즉 눈앞에 있는 이들이, 그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들이 보호망 없는 무한 경쟁에서 단지 한발을 삐끗한 것만으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밖에서 잠을 자는 것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서울역 직원들도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요구에 너무나 충실히 복무했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 자체를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은폐해버리는 일을 늘 수행해온 탓에,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숙인이 죽어야만 ‘발견’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그들을 보이게 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온정’을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돌봄을 국가에 직접 요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단순히 노숙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에 관한 싸움이다. 불안의 본질을 건드리자는 것이다. 그들을 드러내자. 1년 전, 그리고 며칠 전 추위 속에서 숨을 거둔 노숙인들을 애도한다.
한겨레 <박홍근 서울 구로구 구로1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