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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3 (15: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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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서울역은 큰 결심을 내렸습니다. 이름하야 '노숙인 퇴거 조치'. 기차가 운행하지 않는 새벽시간대에는 서울역사 안에 노숙인들이 머무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교통의 중심인 서울역은 언젠가부터 '노숙인들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퇴거 조치 시행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서울역에는 많은 노숙인들이 머무르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대 짧은 시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는 '서울역' 하면 '노숙인'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본래의 기능인 '기차'는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걸 보면, 서울역은 교통 중심지 뿐 아니라, 누군가의 둥지의 역할도 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요즘 서울역을 보면, 사방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굉장히 으리으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백화점, 대형마트, 패밀리 레스토랑, 잘 나가는 SPA 브랜드 매장까지 들어서면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기차도 '삼등삼등 완행열차'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부산까지 3시간에 주파하는 초고속 KTX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서울역은 사실은 '오리지널'이 아닙니다. 원조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옆에요. 빨간 벽돌 건물에, 푸른 빛의 돔이 있는 건물이 '오리지널'입니다. 2004년 KTX가 개통되면서 '오리지널'은 그 기능을 '브랜드-뉴'에게 내주었습니다. 어디론가로 향하는 승객들이 떠난 '오리지널'. 자기 할 일을 잃은 이 역사는 이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오리지널 역사(驛舍)는 역사(歷史)로 남았습니다. 1925년 준공 당시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되찾은 것입니다.

                 


☞ 1925년 준공 당시 서울역의 모습

구 서울역사는 이제 더이상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시간이 오가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름하야 '문화역서울 284'. 1981년 사적 제284호로 지정됐다는 의미에서 '284'라는 숫자가 붙었습니다.

                 

☞ 복원이 완료된 구 서울역사의 모습.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문화역서울 284'는 지난 8월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노숙인 퇴거 조치가 내려졌던 시기와 비슷합니다. 물론 문화역서울 개관과 퇴거조치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습니다만, 시기가 미묘하게 맞물리는 게 '생존'과 '문화' 사이 경계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오리지널 서울역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기차를 타러 오는 승객들이 아니라, 설레는 마음으로 지난 90년의 시간을 느끼러 오는 관람객을 맞게 됐습니다.

복원된 서울역은 정말 근대 건축물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문과 창문틀이 딱 맞춰지지 않고 살짝 틈이 벌어진 것도 그대로 뒀습니다. 겨울이 되면 바람이 쌩쌩 들어와서 난방하는 데 애를 먹을 것 같긴 하지만, 1920년대 승무원과 승객들도 그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겠거니 생각하면 그리 춥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듯 합니다.

이런 공간에서는 지금 개관전 '카운트다운'이 열리고 있습니다. 사실 '문화역서울 284'의 공식 출범일은 내년 3월입니다. 지금은 공식 개관을 준비하는 기간이고요. 그래서 내년 3월을 기다리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는 의미의 전시입니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서울역의 출발을 알리는 전시인지라,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작가들의 작품이 다 모였습니다. 모두 35명의 작가가 1920년대 근대 건물에 어울리고, 2011년 현재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공간 자체가 문화재인지라, 못 하나도 박을 수 없어 거의 대부분이 설치 작품이거나 미디어 작품입니다. 

                 

☞ 1925년 당시 3등 대합실. 오늘날로 치면 이코노미석 승객 대합실.

1925년 당시 3등 대합실에는 정연두 작가의 <타임캡슐>이 놓여졌습니다. 스티커 사진 자판기 기능을 갖춘 관객 참여형 작품입니다. 자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3천 원을 넣고 작품 안에 들어가면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아 기찻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게 됩니다. 내가 지금 모르는 과거의 모습을 배경으로 현재의 내가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미래로 가져간다는 의미의 <타임머신>입니다. 
 

                  

☞ 정연두 <타임캡슐Ⅱ> 철, 하이막스, 컴퓨터, LED 조명, 카메라 설치, 650 x 290 x 250cm, 2011 
 
기찻길이 내려다 보이는 중앙홀 뒤편 복도에는 기차 승객석이 들어섰습니다. 잭슨홍의 <승객석>이라는 작품입니다. 완벽한 복원은 '원형' 복원과 '기능' 복원이 합쳐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1920년대 '원형'은 찾았지만,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까요. 
                  

☞ 잭슨홍, <승객석>,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1

2층 역장과 역무원의 사무실이 있던 장소에는 웬 고철 덩어리 같은 작품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구동회 작가의 <무제>입니다. 쇳덩어리로 보이는 이 작품의 소재는 바로 서울역에 걸려있던 샹들리에입니다. 오래되어서 낡디 낡은 샹들리에에 악기와 LED 조명을 붙여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냈는데, 제목은 <무제>이지만, 마치 인공위성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 구동희 <무제>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1

부인 대합실, VIP 대합실, 최초의 근대 고급 레스토랑이었던 2층 대식당, 수세식 화장실도 다 작품 전시실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또 한군데 숨겨진 곳이 있습니다. 2층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가다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 나오는데요, 그 계단을 주욱 따라 올라가면 과거 공조실이었던 공간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작품이 떡하니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계륜 작가의 <깃발>입니다. 각종 파이프와 전선이 어지러운 공간, 한 때는 쉴새없이 움직이는 곳이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그 중간중간에 흩날리는 빨간 깃발을 꽂았습니다. 이 깃발은 옆에 설치해 둔 선풍기의 바람을 맞고 힘차게 펄럭이는데요, 끊임없이 돌아가는 서울역의 모습과 '다이내믹' 서울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오래된 나무 냄새가 폴폴나는 오래된 계단은 정말 내가 어느 시대에 있는건지 잠시 잊게해 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 한계륜 <깃발>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1

<문화역서울 284>는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감탄할 정도로 멋진 곳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근대는 일제시대와 맞물렸기 때문에 그 유산들은 과거 청산이라는 명목 하에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또 7~8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바람에 '구닥다리'로 취급당하며 자취를 감추기도 했고요. 제대로 된 근대 건축물 하나 남아있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나름 그때 모습을 되찾은 건축물이 등장하니 반가웠고요. 그런 공간에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정도 걸어둬서 정말 '문화재'로만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모두가 어울려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역은 '노숙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접근성이 살짝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노숙인'도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건물, 현재의 우리가 어울러지는 이만한 공간이 서울에 어디 또 있을까요. 서울역의 기차는 멈췄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카운트다운>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이어집니다.

 

최종편집 : 2011-10-2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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