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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232
2020.12.01 (13:01:12)

[인터뷰]



형제복지원 이후에 만난 사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가 살아온 이야기



<인터뷰 정리: 오규상 / 홈리스뉴스 편집위원>


[편집자 주] 1015, 형제복지원 원장 고 박인근 씨의 특수감금 혐의에 대한 비상상고심 공판이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그 전신인 형제육아원시절부터 고아원 표방 및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납치하여 불법 감금, 강제노역, 폭행, 성폭행, 살인 및 암매장을 자행했다. 1987년 일련의 정황이 드러난 뒤, 원장 박인근이 받은 최종 판결은 횡령죄에 따른 징역 26개월이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십수 년 동안 형제복지원에 감금되었다 풀려난 사람 중 다수는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었고 또 다른 감금을 겪었다. 누군가는 섬에서, 어떤 이는 유인 입원에서, 많은 이는 기약 없이 시설에 머물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박○○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는 어떻게 그 사회를 살아왔는지 들어보았다. 



○○ 연표

연도

만연령

개인사

사회사

1961

 

 

5.16

1962

 

 

박인근 형제육아원 (형제복지원 전신) 인수

1964

0

대전 출생

 

 

 

부모 사망

 

작은아버지 집 가출

 

대전 고아원 생활

 

1971

7

한벌국민학교 입합

 

1972

8

한벌국민학교 중퇴

유신헌법 발효

서울, 부산 아동보호소 생활

 

1973

9

부산진역 노숙 중 형제육아원 강제 수용

 

1975

11

 

형제복지원 개설(내무부훈령 제 410)

1979

15

 

10.26 12.12

1980

16

 

5.18

삼청교육대 설립

전두환 대통령 당선

1983

19

형제복지원 탈출

 

서울역 노숙 생활

1986

22

 

서울 아시안게임

 

 

인신매매, 명의도용 피해

 

1987

23

결핵 판정

박종철고문치사사건

4.13 호헌

이한열 사망

6월 항쟁

노태우 대통령 당선

형제복지원 폐쇄

1988

24

결핵 치료

서울 올림픽

1989

25

인신매매로 일하던 공장 폐업

박인근 형 확정

(징역 26개월)

노숙 및 윤00 만남(남대문5)

2010

46

수급권 얻음(동자동)

 

2017

53

○○ 병간호 시작

 

2020

56

○○ 사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통과



대전과 서울에서 고아원을 전전하다 형제복지원으로

1964년생인데, 대전에 살았어요. 어려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그다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작은아버지 집에 있었는데, 만날 맞아서 집을 나와서는 대전 아동보호소에 잡혀갔어요. 고아원에서 한벌국민학교에 댕겼는데, 2학년 중퇴에요. 학교 선생님이 때려서 고아원에서도 나왔어요. 다음에는 서울에 있는 아동보호소에 갔다가,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낸다는 걸 내가 말을 잘못해서 부산에 있는 아동보호소로 갔어요. 거기서도 날 문제아라고 해서 도망 나왔어요. 그리고 부산진역에서 1~2년 노숙을 하다가 73년도 10살 때 형제육아원에 갔어요. (형제복지원은 어떻게 들어갔어요?) 잡혀갔지요. 어른들이 와서. 납치에요 납치. 형제복지원이 원래 고아원이었거든요. 그게 부랑인 시설로 바뀐 거예요. 고아원일 때도 사람 못살 곳인 건 마찬가지예요. 거기에 있다가 죽다가 살아났구만. 못 먹어서 영양실조 걸려가지고. 지금 살이 많이 찐거예요. 뼈다귀 밖에 남지 않았지 그때. 그러다가 1983년도에 나를 울산에 작업 보내서 거기서 내가 도망 나왔는데, 부산에 있었으면 내가 다 데리고 나왔을 거예요. 울산에서 도망쳐서는 바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는데, 그때는 노숙자가 아니라 거지죠.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까. (형제복지원이 1987년도에 폐쇄가 됐죠?) 테레비에 형제복지원이 나오더라구. 뉴스에 나오고, 박인근 살아있을 때니까. 근데. 그때 제대로 해야 하는데. 박인근이 2년인가, 1년인가 살고 나왔을거여. (텔레비전으로 보니까 어떠셨어요?) 테레비로 보니까, 감방에 가니 안가니 하더니 형량이 십몇 년에서 갈수록 내려가더라고. 그러더니 2년인가 나왔어요. 나온 이후로는 깜깜하고 소식이 없어. 언젠가는 어느 국회의원이 형제복지원이 아무 증거도 없다고. 그래서, ‘저 새끼 저거 미쳤나? 이 씨발놈이 뭐가 형제복지원이 어쩌고 저게 떠들고 있어?’ 싶었지. 너무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피해자 모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국회 앞에 있던 농성장을 철거를 안 했어야 했는데. 국회 올라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거긴 아무나 못 올라가요. 근데 거길 올라가니까 과거사법이 통과된 거예요. 과거사법이 통과되는 과정을 제 눈으로 봤거든요. 민주당, 정의당, 한나라당 국회의원 다 있는 데서 통과가 된 거란 말이에요. 법이 통과됐는데, 그러면 수사를 나와야 하는데, 수사도 안 하고 제가 갑갑한 거예요. 87년도에 사건이 터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이렇게 있는 거예요. 보상도 안 해주고 말만.

     

여섯 번의 인신매매가 시작된 서울역

서울역에 사람을 인신매매하는 새끼들이 있어요. 내가 인신매매 여섯 번을. 고생을 무지했어요. 사람 잡아 섬에 팔아먹는 것들. 처음에는 고기 잡는 데로 갔는데, 내가 고기를 못 잡으니까 김 하는 데로 갔어요. 맨 처음 간 데는 돈을 조금 받기는 받았지. 그다음부터는 돈을 일원도 못 받으면서 김 만드는 데를 네 군데 정도 다녔죠. 그런데 돈을 안 주니까 도망 나오고, 또 잡혀가고 했어요. 노가다도 인신매매가 있더라고, 한번은 노가다 하는 데 땅 파는 기사가 있잖아요.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나온 거지. 그 사람들이 무조건 빠져나오라고 했어요. 거짓말 때려가지고 빠져나오기만 하면, 우리가 책임지고 배 태워서 내보내 준다. 그 사람들 아니면 못 나와요. 거기가 섬이거든. 하하하. 내가 거짓말을 때려서 우리 누나, 가족 만나야 하니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나와서 마지막으로 간 데는 공장이었는데, 인신매매하는 새끼들이 여기저기 계속 있어서. 내가 그 인간들에게 김 양식 말고 공장으로 보내 달라고 했어요. 87년도에서 88년도, 그때 내가 공장을 댕겼거든. 숟가락 도금하는 데였어요. 근데, 89년도에 회사가 망해서 다시 노숙자 생활을 한 거예요. 그렇게 노숙을 하다가 IMF가 터졌는데, 그전에는 노숙자란 말도 없었어. 거지가 노숙자인 거지. 그전에는 잠잘 곳도 서울역 딱 한 군데뿐이었어. 지하철에서 잠도 못 잤지. 오히려 IMF 터지고 나서는 아무 지하철에서나 밤에는 잠잘 수 있잖아요. 그러다가 명의도용도 당했어요. 핸드폰이 여덟 대가 있었어요. 한 칠천만원인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기 치는 사람이 주민증하고 다 가져갔단 말이에요. 그거는 내가 돈을 안 주죠. 못 주죠.

   

인터뷰 최종.jpg

▲ 박씨의 방에는 돌아가신 윤00씨의 영정이 있다.

<사진출처=홈리스뉴스 편집부>


 

양동에서 만난 윤○○ 형님

서울에 와서 다시 거지 생활을 했지. 그 전에 김 만드는 데서 일할 때, 내가 술을 많이 먹으니까 몸이 안 좋아졌는데, 나중에 공장에 다닐 때, 하루는 술이 너무 안 받고 오바이트가 나오는 거야. 그래서 약국에 갔더니 약사가 혓바닥을 보재. 혓바닥을 보여주니까 빨리 병원에 안 가면 죽는다는 거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띄워보니까 구멍이 뽕뽕뽕 났어. 폐병이. 그리고 또 간이 안 좋은 것 같대. 간은 초기였고 결핵은 3기 정도 됐어. 원래 폐병이 걸리면 공장에서 내쫓아요. 그래서 내가 공장에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냐. 문 닫고 살겠다고했어. 그렇게 7개월 동안 주사랑 약을 맞았거든요. 후에 공장을 나와서도 약을 1년을 더 먹었지. 그리고 그지생활 하면서 서울역에서 동냥 얻은 걸 모아서 하루에 8천 원씩 방세를 내고 양동 쪽방에 살았어요. 한 달로 따지면 삼십만원이 넘으니까 큰돈이에요. 거기서 윤○○ 형님을 만난 거예요. 형님이 먼저 살고 계셨어요. 안 지가 삼십 년이 넘었네.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친형제나 마찬가지지. 형님은 1989년 넘어가자고 만났는데, 조기 위에(남대문경찰서에서 백범광장 쪽으로) 올라가면 CJ 건물 있죠. 거기서 만났어요. (○○씨와는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1989년도에 나랑 형님이 같이 양동 쪽방 2층에 있었죠. 거기에서 CJ 말고 공장가 또 있었어요. 거기 주차 관리를 했는데, 내가 글을 모르니까 형님을 책임자로 하고 같이 일했죠. 그때부터 주차일도 보고, 고물도 주우면서 함께하기 시작했어요. 양동에 있다가 동자동에 왔죠. 지금 내가 사는 방이 형님 살던 방인데, 이 방도 내가 얻어준 거죠. 원래 내가 살라고 그랬는데, 형님은 마누라가 있고, 여기가 둘이 살기 좋아서.

 

○○ 형님의 죽음

아프면, 나한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지 혼자만 하고 있었어요. 내가 부산 갔다 와서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니까 형님이 숨이 차서 넘어가는 거야. 119를 불러봐야 한참 걸릴 것 같고, 내가 댕기는 교회에 가서 목사한테 형님 좀 도와주소하니까, 대답이 시원찮더라고. 하는 말이 안 도와줄 것처럼 이야기해. 다시 집에 와서 형수한테 물어봤지. “살릴 거요? 죽일 거요?” 그랬더니 뭐라는지 알아요? 자기하고 둘 다 죽으면 된다는 거야. 그게 말이야? 형님이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그러는데 목사가 와서 바로 119에 신고를 하더라고. 병원에 가서 목사는 좀 있다 돌아가고 형님은 새벽 3시인가 정신이 들어온 거야. □□! □□! 하고 제 마누라를 부르더라고. 중환자실에서. 그리고 29개월 동안 내가 생고생 해서 도와줬는데, 그렇게 가시네. 돌아가신 건 올해 625일인가? 그쯤인데 모르겠네. 가망은 없었어요. 그래도 혹시나 두 달 넘게 병원에 있으면 건강이 좋아지겠지 생각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석 달인가 지났는데 아무래도 힘들겠더라고. 내가 병원에 데리고 갔을 때, 간이 안 좋다면 오래 못 사는 거 뻔한데, 더 살려면 누가 병간호를 해야 하는데, 마누라가 치매니 누가 돌봐. 형님 마누라는 지금도 입원해서 못 나와요. 내가 형님 배도 홀쭉하게 맨들어놓고, 좀 괜찮아졌단 말이에요. 근데 씨발 일주일 동안 약도 제대로 안 먹이더라고. 나한테 미리 이야기했으면 지금도 살아있을 건데, 내가 병원을 데고 가잖아요. 내가 29개월 동안 봉사를 한 거예요. 29개월이네. 형님 면회를 하러 가면 이 새끼들이, 간호사들이 내 면회를 잘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 내가 안 씻고 이러니까. 내 보호자가 지금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내가 가야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면회 가면 한두 시간 보고 돌아가요. 근데 나는 씨발 아침에 가면 저녁 10시까지 있는 거예요. 그랬는데, 그게 또 의사들도 지랄 같다. 병실에 3일 딱 있었는데, 본인한테 전화가 와요. 퇴원한다고. “아니 2주 있다가 퇴원한다며?” 하니까 의사가 가랬대. 의사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요. 본인이 무단으로 퇴원한 것도 있고. 한번은 면회를 하러 갔는데 환자가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간호사도 모르고. 집에 와보니까 치매 걸린 마누라가 남편이라고 딱 붙잡고 있네. 간호사에게 말을 안 하고 집에 가니까 무단 퇴원이었죠. 그래서 내가 욕을 했어요. “야 이 씨발 지금 뭐 하는 거요 형님.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병원에 없고 집에 있으면!” (○○씨께 참 잘해주셨네요.) 내가 원래 수급권이 없었어요. 형님이 만들어준 거야.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약값이 솔찬히 나오니까, 수급을 신청했는데, 처음에는 수급권이 빠꾸가 됐어요. 그래서 노가다를 댕기고 있었는데, 서류를 가지고 오래서 3개월 동안 서류를 만들어서 가져다주니까. 되더라고요. 근데 수급권을 받으려면 동사무소를 거쳐서 신청해야 하는데, 형님이 바로 병원엘 가서 의사 선생님께 우겨서 좋은 걸(장애 3) 받아다가 수급권을 만들어줬어. 그게 한 10년 전일 거예요. 동사무소에서는 동사무소엘 먼저 와야 하는데 거꾸로 했다고 형님한테 엄청 지랄했는가봐. 나는 욕을 안 들어먹었지만, 그 형은 욕을 아주 바가지로 먹었어요. 그런데 형님은 야 그럼 좀 어때.” 했어요. 그리고 또 내가 15일 동안 못 일어난 적이 있어요. 그때, 형님이 옆에서 날 깨우고 그랬어요. 나를 살려준 거죠. 형님이 아프니까 마누라가 해야 하는데, 마누라가 치매 걸려놓으니, 병원 가는 길도 모르고, 나는 그 병원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니까 길을 알잖아요. 암만해도. 그러니까 내가 데고 그거 한 거죠. 형님도 나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니까 나도 그거 살리려고 했는데. 형님이 나으려면 이식을 받아야 되는데, 이식해줄 사람이 있어야지. 돈도 1억이나 들어간다는데, 1억이. 그래도 고마운 게 형님이 29개월이나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 형님 죽을 때 그래. 형님이 눈뜨고 돌아가셨는데, 내가 맘대로 손을 못 대잖아요. 간호사가 이불을 딱 덮어주더라고요. 나는 그걸 보고 한참 멍하니 있는 거예요. 형님이 냉동실에 가는 걸 보는데, 누가 어떤 관계요?”라고 물어. “내 보호자인데, 거꾸로 됐어요. 내가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했어. 그이가 다시 몇 년 됐어요?”라고 해. “아는 지가 한 사십 년 됩니다. 친형제보다 더 그거 하는 사람입니다.” 했어. 그랬더니 또 이분 가족이?”라고 물어. “가족 백날 찾아봐야 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한 달 넘어서 나한테 그거 장례 하라고 연락이 올 겁니다. 가족이 안 오면 나한테 오게 되어있어요. 제가 한 달까지는 병원에 안 옵니다. 그런데 한 달 넘어가자고는 나한테 연락 올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했어. 보니까 형제들이 다섯 명이 되는데, 한 명도 안 온 거예요. 한 달 하고 팔일 정도 됐나? 그걸 또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아 진짜.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랑 가서 화장했어. 옛날에는 냇가나 강가에 뿌려줬는데, 이젠 그게 아니야. 가니까 거기 층 꼭대기에 윤○○씨라고 되어 있어. 가서 제사도 지내고, 뼈다구도 넣고. 그게 딱 끝나고, 내가 사진 달라고 하니까 사진을 주더라고. 형수는 오지도 못했어. 그래도 남편 죽은 건 알아요. (형수로 이야기되는 박□□씨는 윤○○씨와 법적 혼인 관계가 아닌 동거 관계였으며, ○○씨 사망 당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쪽방촌의 일상

시간 되면은 나가서 커피 마시고 들어와서 테레비 보다가, 핸드폰으로 게임 하는 것뿐이 더 있겠어요? 내가 글을 못 쓰니까 옆에서 도와주는 분들은 있어요. 그래도 돌아가신 형님이 안 아플 때는 나를 엄청나게 챙겨줬는데, 몸이 아프고부터는. 저짝 청파동에 강○○라고 있어요. 그 사람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에 신청해있어요. 그래서 걔가 연락을 해줘야 하거든요. 진짜 서운하죠. 원래 형님이 내 보호자인데, 형님이 몸이 아프면서 강○○에게 내 서류를 맡겨 놓은 거야. “네가 박○○랑 형제복지원에 같이 있었으니까, ○○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네가 해줘라.” 했거든. 근데 형님 딱 돌아가시니까 연락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전화해서 그랬어요. “15일에 재판했다는데,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어? 내가 말을 잘 못 하잖아. 보호자면 그런데 같이 가야 되잖아.” 그랬더니 강○○1121일에 부산에 가면 보상 이야기도 한다고 하더라고. 이 밑에 내려가면 피해자가 한 분이 더 있어. 근데 걔는 부산 안 내려간대.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내가 수급이 있고, 장애 3급이에요. 돈은 한 달에 수급비 68만 원이랑 장애 수당 45천원 합해서 73만원 쯤 받아요. 이걸 받아서 집세로 공과금까지 14만 원을 내면 59만원 정도로 사는 거죠. (혹시 돈이 더 있으면 더 하고 싶은 게 있으세요?) 난 필요한 건 없어요. 형제복지원 빨리 돈 나오는 거, 이게 중요한 거지. 만약에 형제복지원에서 돈이 나온다 그러면 수급 나오는 게 끊어져요? 보상을 받는다고 나오는 게 끊기면은 그것도 이상하다. 형제복지원 중에 수급받는 사람이 거의 다요. 거기 있던 사람 중에 나라에서 돈 안 나오는 사람 몇 명 안 돼. (왜 그곳에 있던 분들은 대부분 수급을 받을까요?) 형제복지원에 있던 애들은 많이 안 배웠고 말도 안 되고. 87년도에 이거를 해결을 해야 했는데, 너무 끌었어.

 

나의 집, 나의 형님

지금 사는 방이 형님이 살던 방이야. 형수 이름이 박□□인데, 치매라서 못 나올 거야. 사실 이 방도 원래 내 방이었는데, 형님이 쓴 거기도 하지. 내가 형님이랑 삼십 년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일로 다시 옮긴 거예요. 이제 형님이 죽었으니까 내방이죠. 그 사진만 보면 참. (방에 있는 영정이 형님이신 거죠?) 형님 생각은 안 할 수가 없지. 하늘나라 갔는데, 편하게 보내준다고 보내줬는데, 천국은 잘 갔는가 싶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내가 더 비참한 이야기 해도 돼요? 그지 생활 했으니까. 공장을 다닌거 빼고 나서는 거렁뱅이 아니에요? 하하하. 형제복지원이 크잖아요. 하루에 150명 잡아 오면은 100명이 도망갔어요. 그렇게 해서 집을 크게 맨들은 거예요. 그냥 시멘 벽이 아니고, 사람이 일일이 벽돌을 찍어서 만든 거예요. 거기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거기도 군대식으로 소대장이 있고 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북한보다 더 악독한 게 거기에요. 나는 거기서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고. 지금 사는 건 그때 비하면야...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배상이 빨리 결정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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